디자이너가 바라본 기획자
디자이너가 바라본 기획자
광고 기획을 하다 보면, 디자이너에게 협업을 요청해야 할 때가 많죠. 이미지 배너 제작이 필요하거나, 상세페이지 제작이 필요하거나 등등.. 아무래도 광고를 위해선 크리에이티브가 빈번하게 필요하다 보니 기획자와 디자이너는 마주칠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날, 내가 생각해도 완벽한 컨셉과 카피, 스토리라인 등을 포함한 훌륭한 광고 기획안을 작성하여 컨펌을 완료했다 칩시다. 컨펌도 받았겠다 뭐 하나 빠질 것 없는 기획안이라 생각했건만, 어째선지 디자이너에게 넘겼을 때에 표정이 밝지 않은 경험이 있지 않으셨나요? ‘내가 기획한 광고의 컨셉이나 내용이 마음에 안 드나..’ 싶을 수 있지만 애초에 그랬다면 컨펌 단계에서 통과하지 못했겠죠.
이유는 간단합니다. 디자이너가 기획안을 받자마자 보통 머릿속에 떠올리는 것은 ‘그래서 이걸 실제로 어떻게 구현하지?’ 하는 생각이지요. 하지만, 기획자의 입장에서 작성한 기획안 내에는 기발한 컨셉과 멋진 카피는 담았을지언정 실제로 어떤 크리에이티브를 구현하고 싶은지에 대해서는 그렇다 하게 기획하지 않은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이런 말을 하면 기획자는 ‘아니 그럼 내가 상세한 디자인까지 다 짜 주어야 한다는 건가? 그럼 그냥 내가 디자이너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 물론 오해입니다. 디자이너가 소위 짜증이 나는 경우는, 기획자가 본인이 기획한 크리에이티브에 대해 고객 정도의 이해도를 가지고 있을 때지요. 더해서, 제작 일정에 대한 기대치까지 고객 수준이라면 금상첨화입니다.
고객 아니고 기획자시잖아요
고객이 본인의 브랜드에 대해 이해도가 깊고, 더 나아가 브랜딩과 컨셉을 구체적으로 서술할 정도가 된다면 크리에이티브 제작 난이도는 쉬워집니다. 크리에이티브에 대한 자사의 의견도 확실하고 제작 방향성 또한 명확해지기에 무엇을 제작하든 수월해지죠. 하지만 이 정도의 고객은 이상적인 것으로, 결코 흔하지 않습니다. 보통 고객이 크리에이티브 제작을 요청할 때에 던져주는 주문 사항은 이런 수준이죠.
"어.. 뭔가 좀 전체적으로 막 빨강 쓰고 임팩트 있고.. 청룡의 해니까 청룡 그림 좀 쓰고 하면 좋을 것 같아요."
"이제 프리미엄한 느낌으로 가고 싶거든요. 다른 데 보면 뷰티컷 많이 사용하고 그러던데 저희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새해니까 해가 뜨는? 약간 일출 그런 배경으로.. 예. 새해 느낌 났으면 좋겠어요."
분명 이렇게 말하는 고객의 머릿속에는 그려놓은 청사진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듣고 있는 디자이너는 머릿속을 들여다볼 수 없으니 알 턱이 없죠. 디자이너가 위와 같은 요청을 들었을 때에 받아들이는 정보는 정말 말 그대로 ‘빨간색 사용’, ‘임팩트 있게’, ‘청룡 그림 사용’, ‘프리미엄 컨셉’, ‘뷰티컷 사용’, ‘새해 느낌’ 등 피상적인 키워드입니다. 이 키워드를 머릿속에서 어떤 식으로 조합한들, 고객의 머릿속에 있는 청사진과는 동떨어진 경우가 허다할 겁니다.
그래도 어떡하겠어요? 디자이너의 업무는 그런 모호한 요청 사항을 배경으로 어떻게든 크리에이티브를 기획하고 고객에게 제안하는 것이고, 그걸 받아보는 것은 고객의 권리입니다. 고객과 대행사의 입장이니 아무리 비효율적이어도 툴툴거릴 수 없는 것이죠.
하지만 상대가 고객이 아닌 기획자라면 이야기가 다르지요. 같은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 기획자와 디자이너는 서로 동료의 입장이고, 기획자가 본인이 기획한 크리에이티브에 대해 위와 같이 고객사 수준의 이해도를 가지고 있다면 디자이너는 해당 기획자의 매니징에 대한 신뢰도를 잃을 수밖에 없습니다. 한 마디로 ‘자기가 기획해 놓고 본인도 뭘 만들고 싶은지 잘 모르네.. ’ 싶은 거죠. 그렇게 갈 길을 잃은 크리에이티브는 업무 효율성을 심각하게 저해하는 요소가 되는 거고요.
눈에는 눈
출처 : 네이버 영어사전
물론 기획자 입장에서도 디자이너에게 크리에이티브 제작 방향성을 어느 정도로 제시해야 하는지 가늠하기 힘들 수 있습니다. 그런 모호한 생각이 들 때에는, 레퍼런스를 떠올리시면 됩니다. 크리에이티브는 시각적인 것이고, 그런 시각적인 것을 제작하는 디자이너에게 있어서 가장 효과적인 어필은 마찬가지로 시각적인 레퍼런스인 것이죠.
기획자 또한 무언가를 기획할 때에 분명 머릿속에 불분명하게나마 떠오르는 크리에이티브의 모습이 있을 겁니다. 위에서 고객이 설명하던 모습처럼요. 해당 기획자가 창작자의 기질을 타고난 소수가 아니라면, 그 모습은 분명 완전히 새로운 것이 아니라 어딘가에서 본 것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광고든 영상이든 어쩌다 본 크리에이티브의 특정 요소(색상, 사용한 오브젝트, 컨셉, 사진, 레이아웃 배치 등)들이 인상에 남았고, 그게 좋았기에 기획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것이죠. 그렇다면 아주 간단하게 해당 크리에이티브 또는 비슷한 것들을 찾아 디자이너에게 레퍼런스로 제시하는 것이 가장 직관적인 것입니다.
때로는 가타부타 말할 것 없이, 레퍼런스만 다량으로 보여주고 ‘이런 거 만들고 싶다.’ 한 마디만 하는 것이 오히려 더 효율적일 때가 있습니다. 물론 최소한의 방향성은 얘기해 줘야겠지만요. 위에서 고객이 이야기한 추상적인 주문 사항들은, 말만 들어서는 도무지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렵지만 실제로 그 모습을 구현한 레퍼런스를 제시한다면 단박에 이해할 수 있겠죠.
그렇다고해서 완벽하게 똑같이 구현한 레퍼런스를 찾는 데에 매몰되면 그건 그것대로 비효율적입니다. 윤곽을 알 수 있을 정도의 적정선만 지켜진다면, 그것을 해석하고 구현해 내는 것은 디자이너의 몫인 거죠.
생각보다 디자이너는 잘 모른다
좀 더 실무적인 이야기로 들어가 볼까요. 기획자는 기획안을 짧게는 몇 시간, 길게는 며칠 동안 붙잡고 있기에 본인의 기획에 대한 이해도가 매우 높습니다. 그러다 본인도 모르게 디자이너 또한 자신만큼의 이해도를 가지고 있을 거라 생각하는 경우가 있지요. 예를 들어볼까요.
‘... 정상가는 얼마고 할인가는 얼마지?’
한 디자이너가 어떤 제품의 광고 소재를 만들기 위해 기획안을 살펴봤더니 ‘정상가, 할인가 기재’라고 적혀있습니다. 이 경우에 기획자는 본인이 해당 가격을 알고 있기 때문에 구태여 쓰지 않은 거겠죠. 하지만 당연하게도, 디자이너는 모를 수 있습니다.
'... 무슨 사진 말하는 거지? 그리고 어디에 있지?'
이 경우 또한 기획자는 정확히 어떤 사진을 말하는지 알겠지요. 그렇지만, 해당 소스에 대해 인지하고 있지 않은 디자이너는 충분히 혼란에 빠질 수 있습니다.
이렇듯, 서로 가지고 있는 정보 격차로 인해 제작이 원활하지 않은 경우가 있을 수 있어요. 따지고 보면 심각한 문제는 아닙니다. 그냥 기획자에게 물어보고 답변을 받으면 끝이죠. 하지만 이런 경우가 반복된다면, 분명히 제작 효율성을 크게 저해하는 요인이 될 겁니다.
생각보다 기획자는 잘 모른다
이 외에도, 기획자가 실무를 진행하지 않기에 고려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으로는, 활용 가능한 디자인 소스를 생각하지 않는 경우입니다. 간혹 이럴 때가 있죠.
기획자 : 이번에 이렇게 레퍼런스처럼 연출컷 사용해서 고급스러운 느낌을 좀 내고 싶은데요.
디자이너 : 음.. 힘들 것 같은데요.
기획자 : 왜요?
디자이너 : 저희는 저런 사진이 없어서요..
레퍼런스를 제시하라고는 했지만, 그전에 정말 그대로 만들 수 있을지에 대한 일말의 생각은 해 보아야 합니다. 누구도 허섭스레기 같은 레퍼런스를 들고 오지는 않겠죠. 분명 제시하는 레퍼런스는 퀄리티가 높을 것이고, 거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겁니다. 보통 그 이유는 애초에 퀄리티가 높은 디자인 소스(사진, 영상 등)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죠.
예쁘고 멋진 연출컷을 사용한 크리에이티브를 들고 오더라도, 당장 우리가 가진 게 누끼컷이나 B급 영상 정도밖에 없다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기획자 입장에서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것으로는, 제작 일정에 관해서 이야기할 수 있겠네요. 당연히 실무를 진행하지 않는 입장에서는 크리에이티브 제작을 위해 시간이 정확히 얼마나 걸리는지 파악하기 힘들 겁니다. 하지만 문제가 되는 때는, 디자이너와 협의하지 않고 자의적으로 ‘이 정도면 되겠지?’ 하고 생각하는 경우죠. 그리고 보통 그렇게 짐작하는 기간은 고객이 짐작하는 기간과 비슷합니다. ASAP을 디폴트로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고객과 비슷하게 기획자 또한 제작은 빠르면 빠를수록 이상적이기에 기대하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디자인은 사람이 하는 것이고, 그렇다 보니 최소한의 범퍼 기간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기획자와 디자이너 사이에 명확하게 합의되지 않으면 기획자는 기획자대로 일을 늦게 주고, 디자이너는 디자이너대로 야근하는 악순환이 생길 수 있는 것이죠. 이 문제의 해결방법은 쉽고 명확합니다. 서로 제작 가능한 일정에 대해 지레짐작하지 않고 협의를 하여 업무 요청 및 제작 일정 가이드를 확실하게 세워놓으면 되는 거죠.
각자의 사정
디자인 업무를 주로 수행하다 보니, 글을 쓰는 과정에서 다소 억하심정이 드러난 것 같기도 하네요. 하지만 대부분의 문제들은 따지고 보면 상호 간의 소통의 부재에서 생기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반대로 얘기하면 소통이 원활하다면 해결되는 문제들이 아닐까 싶어요.
물론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니겠죠. 기획자는 기획자의, 디자이너는 디자이너의 사정이 있지 않을테니까요. 둘이서만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보니 다양한 이해관계가 얽혀서 어쩔 수 없이 생기는 문제들도 있겠지 하는 생각도 들고요. 저는 반대로, 기획자만이 가지고 있는 고충이 궁금하기도 합니다. 혹여나 말하고 싶었던 것이 있다면 들려주셨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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